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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영화는 범인을 끝까지 숨겨야 재밌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나이브스 아웃은 개봉한 지 40분도 안 돼서 범인과 트릭을 다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게 오히려 더 재밌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올해 본 영화 중 두 번째로 좋았다고 확신했습니다.

 

추리물의 공식을 의도적으로 깬 설계

일반적으로 추리물, 즉 후더닛(whodunit) 장르는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틀어쥐고 가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여기서 후더닛이란 "Who done it(누가 했나)"의 줄임말로, 독자나 관객이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 자체가 핵심인 서사 구조를 의미합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이 형식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라이언 존슨 감독은 이 공식을 정면으로 뒤집었습니다. 초반에 간호사 마르타가 모르핀을 과다 투여했다는 사실, 할란이 자살로 위장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먼저 다 보여줍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시점에서 머릿속이 잠깐 멈추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럼 두 시간을 어떻게 끌고 가지?" 싶었거든요.

 

이 질문에 감독이 대답하는 방식이 바로 이 영화의 진짜 설계입니다. 관객이 이미 아는 사실과 탐정 브누아 블랑이 조금씩 파악해가는 사실 사이의 간극, 그 긴장감이 전혀 다른 종류의 스릴을 만들어냅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 구조입니다. 특히 마르타에게는 거짓말을 하면 구토 반응이 나타나는 설정이 붙어 있는데, 이 신체적 장치가 단순한 캐릭터 설정을 넘어 서사의 엔진 역할을 합니다.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인물이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영화 내내 관객을 붙잡아 두는 구조적 장치인 셈입니다.

 

랜섬의 계획과 마르타의 직업적 감각

반전의 진짜 무게는 중반 이후에 드러납니다. 손자 랜섬 드라이스데일은 할란이 전 재산을 마르타에게 상속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사전에 마르타의 약물 가방 속 라벨을 바꿔치기합니다. 계획대로라면 마르타는 살인 혐의로 체포되고, 상속인 결격 사유(murderer's disqualification)가 적용되어 재산이 다시 가족에게 돌아갔을 겁니다. 여기서 상속인 결격이란 불법 행위로 이익을 취할 수 없다는 법 원칙으로, 살인범은 피해자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라벨을 보지 않고 약병의 무게와 점도를 감각으로 구분해 올바른 약을 투여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범인을 이긴 것이 추리가 아니라 현장 숙련도, 즉 수년간 쌓아온 직업적 감각이라는 점이요. 랜섬의 정교한 계획은 마르타의 손끝 감각 하나에 무너집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후더닛 구조를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관객의 시선을 '어떻게 드러나는가'로 이동시킨 서사 설계
  • 거짓말 불가 체질이라는 신체적 장치를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 직접 연결한 구성
  • 범인을 꺾는 결정적 요인이 탐정의 추리가 아닌 간호사의 직업 윤리와 숙련도라는 역설
  • 마지막 장면에서 파티용 소품 칼이 영화 제목 나이브스 아웃의 중의적 의미를 완성하는 방식

 

크리스 에반스의 연기는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 이미지에 완전히 반하는 냉소적이고 오만한 인물인데, 불쾌함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습니다.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습니다.

 

가족주의와 계급 위선,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말

영화의 배경이 되는 저택 거실에는 수십 개의 칼로 만든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이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를 통해 연출 의도를 표현하는 기법으로 보자면, 이 의자는 스롬비 가족 내부의 권력 구조와 잠재적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한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찌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스롬비 가족은 마르타를 "가족 같다"고 말하면서도 그녀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매번 다르게 말합니다. 에콰도르, 파라과이, 브라질, 장면마다 바뀝니다. 이건 실수가 아니라 설계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되는 순간, 이 가족이 얼마나 빠르게 마르타의 어머니 불법 체류 신분을 무기로 삼는지와 정확하게 호응합니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계급 재생산(class reproduction)이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건드립니다. 계급 재생산이란 특권층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다음 세대에 유지·전달하는 메커니즘을 말하는데, 스롬비 가족의 각 구성원이 아버지의 재산에 의존하면서도 자립한 척 행동하는 모습이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일반적으로 상류층 가족은 자수성가를 강조하지만, 제 경험상 이런 영화 속 묘사가 현실을 훨씬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르타가 "My House, My Rules, My Coffee"라고 적힌 컵을 들고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는 단순한 통쾌함을 넘어섭니다. 그 컵은 할란의 것이었고, 이제 마르타의 것입니다. 부와 공간과 권위가 어떻게 이동하는가를 한 컷으로 정리한 장면입니다. 영화 연구에서는 이런 구도를 권력 역전의 시각적 확인이라고 표현합니다([출처: 미국영화연구소 AFI](https://www.afi.com)).

 

나이브스 아웃은 2019년 전미 비평가 협회에서 최우수 앙상블 연기상을 수상했으며, 라이언 존슨 감독은 오리지널 각본으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올랐습니다([출처: 미국 아카데미 공식 사이트](https://www.oscars.org)).

 

후속편 글래스 어니언보다 1편을 더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장르 실험과 사회적 메시지, 캐릭터 설계가 가장 긴밀하게 맞물린 작품이 바로 1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추리물에 익숙하든 아니든, 한 번쯤 정주행해 볼 만한 영화입니다. 특히 결말 이후 처음 40분을 다시 돌려보면, 처음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장면들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