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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비극적인 로맨스를 잘 못 봅니다. 예고편에서 플로렌스 퓨의 삭발한 모습이 보이는 순간, 아 이거 뻔하게 아픈 영화구나 싶어서 한참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극장에 앉아 있었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결의 작품이었거든요.

차에 치여 시작된 사랑, 그리고 비선형 서사가 만든 마법

처음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꽤 인상적입니다. 촉망받는 셰프 알무트가 운전하던 차에 토비아스가 치이는 장면인데, 차에 치이듯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영화가 문자 그대로 구현해버린 셈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 그 어색하고 당혹스럽던 순간들이 떠올라서, 이 황당한 첫 만남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설계는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 구조입니다. 비선형 서사란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풀어가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불규칙하게 오가며 전개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단순히 시간을 뒤섞는 게 아니라, 지금 두 사람이 왜 이 감정 상태에 있는지를 과거의 장면으로 즉각 답해주는 방식이어서, 마치 누군가의 기억 서랍을 같이 열어보는 느낌이 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의 영화는 자칫 혼란스럽기만 한데, 이 작품은 달랐습니다. 격렬하게 다투는 현재 장면 직후에, 그들이 왜 서로를 그토록 붙잡고 있는지 보여주는 과거 장면이 배치됩니다. 이 교차 편집(Cross-cutting) 덕분에 갈등 장면조차 사랑의 증거처럼 읽힙니다. 교차 편집이란 서로 다른 시간이나 공간의 장면을 번갈아 보여주며 감정적 연결을 만드는 영화 편집 기법입니다. 영화 편집 방식이 관객의 감정 몰입에 미치는 영향은 실제로 영화 연구에서도 주목받는 주제입니다. 영화 이론 연구에 따르면, 비선형 구조는 관객이 단순히 사건을 따라가는 것을 넘어 감정적으로 능동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출처: 영국영화협회 BFI](https://www.bfi.org.uk)). 실제로 영화를 보는 내내 다음 조각이 어느 시점일지 예측하면서 보게 되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 구조가 만들어내는 가장 강력한 순간은, 평범하게 흘려보냈던 일상의 장면이 뒤에 배치된 맥락과 만날 때입니다. 함께 밥을 먹고, 주방에서 같이 요리를 하는 평범한 장면들이 나중에 다른 맥락과 맞물리면서 갑자기 소중하고 아프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게 이 영화가 관객의 가슴에 오래 남는 진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유한한 시간 앞에서, 사랑이 남기는 것들

영화의 후반부는 암 재발 선고를 받은 알무트의 선택을 따라갑니다. 그녀가 적극적인 항암 치료 대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남은 시간을 살겠다고 결정하는 장면에서, 저는 솔직히 이건 좀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잠깐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그 선택을 비극으로 포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따라가는 방식이, 오히려 더 깊이 마음에 박혔습니다. 알무트가 치료보다 요리 대회 결승 출전을 선택하고, 그 날짜가 결혼 예정일과 겹친다는 사실을 청첩장이 나올 때까지 토비아스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은, 제가 경험상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뒤를 따라가다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녀에게 그 무대는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었던 겁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요소는 플로렌스 퓨의 신체적 변화를 활용한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입니다. 캐릭터 아크란 이야기 전체에 걸쳐 등장인물이 겪는 내면적 성장이나 변화의 궤적을 말합니다. 실제로 삭발까지 감행하며 캐릭터에 몰입한 플로렌스 퓨의 신체적 변화는 알무트라는 인물의 감정적 변화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영화가 알무트의 죽음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토비아스와 딸이 함께하는 평범한 아침 일상으로 넘어가는 결말은 제가 본 영화들 중 가장 조용하고 강한 엔딩 중 하나였습니다. 과도한 신파 없이도 충분히 아프고, 그러면서도 따뜻했습니다.

 

이 영화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시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감정이 더 소중하다
  • 거창한 사건이 아닌 평범한 일상이 사랑의 실체다
  • 사람이 떠나도 그 사람이 남긴 삶의 방식은 일상 속에 살아남는다
  • 사랑은 상대방의 가장 찬란한 순간뿐 아니라 부서지기 쉬운 시간까지 함께하는 것이다

 

존 크로울리 감독은 전작 브루클린(2016)에서도 개인의 감정을 거대한 역사적 배경 위에 섬세하게 얹는 방식으로 영국 아카데미(BAFTA) 작품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출처: 영국 아카데미 BAFTA](https://www.bafta.org)). 위 리브 인 타임에서도 그 섬세함은 여전합니다. 이번에는 역사 대신 시간이라는 더 보편적인 무대를 선택했고, 그 위에서 두 배우가 대사보다 눈빛으로, 설명보다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합니다. 가벼운 기분 전환용 로맨스를 기대하면 조금 무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떠오른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할 일을 다 한 겁니다. 별점은 4점으로,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몇 안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