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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밍 서비스를 뒤적이다가 그냥 틀어본 영화가 예상 밖으로 머릿속에 오래 남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맥신을 그렇게 만났습니다. 198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스타를 꿈꾸는 한 여성의 이야기인데, 보고 나서 "재밌었다"보다 "묘하게 찜찜하다"는 감각이 먼저 왔습니다. 그게 꼭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엑스 없이 맥신을 본다는 것
타이 웨스트 감독이 연출한 X 3부작은 시간 순서로 보면 펄(1918년) → 엑스(1979년) → 맥신(1985년) 순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간 편인 엑스가 넷플릭스에 없었습니다. 펄은 볼 수 있었고, 맥신도 올라왔는데, 정작 맥신의 직접적인 전작이 빠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도 결국 엑스를 요약본으로 대충 파악한 채 맥신을 봤습니다. 그 상태로 보니 솔직히 이건 좀 달랐습니다. 맥신이라는 캐릭터가 어떤 사건을 겪고 살아남았는지,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를 체감하지 못한 채로 영화를 따라가야 했습니다.
여기서 시리즈물에서 자주 쓰이는 전작 오마주(Homage) 기법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마주란 전작의 장면이나 설정을 의도적으로 변형·재인용하여 시리즈의 연속성을 강화하는 연출 방식입니다. 타이 웨스트 감독은 이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엑스를 모르면 맥신 안에서 그냥 흘려버리는 장면들이 제법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보면서도 "저게 엑스와 연관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고, 그 분산된 주의가 영화에 온전히 몰입하는 걸 방해했습니다.
엑스 없이 보는 게 치명적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맥신 단독으로도 이야기 흐름은 따라갈 수 있습니다. 다만 캐릭터에 감정적으로 이입하는 깊이가 확실히 달라진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오누아르와 지알로 무비, 이 조합이 모두에게 통하진 않는다
맥신의 장르적 정체성은 네오누아르(Neo-Noir)와 지알로 무비(Giallo Movie)의 혼합입니다. 네오누아르란 1940~50년대 고전 누아르 영화의 어두운 분위기와 도덕적 모호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장르를 가리킵니다. 지알로 무비는 1960~70년대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공포·스릴러 하위 장르인데, 쉽게 말해 선명한 원색 조명, 과장된 폭력 묘사, 신원 불명의 살인마라는 세 가지 요소가 특징입니다. 저는 솔직히 지알로 무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긴장감보다 미학적 자극에 집중하는 방식이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어서, 펄을 볼 때보다 맥신에서 체감 만족도가 낮았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반대로 이 장르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꽤 매력적인 작품일 수 있다고 봅니다.
타이 웨스트 감독이 1985년 로스앤젤레스의 질감을 얼마나 공들여 재현했는지는 분명히 느껴집니다. 성인 영화 산업과 주류 할리우드가 교차하는 그 시기의 도시 분위기, 리얼 나이트 스토커 연쇄살인 사건이 실제로 도시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시대적 맥락이 배경 설정 안에 촘촘하게 녹아 있습니다. 이런 시대 고증을 통한 장르 재현 측면에서는 꽤 공들인 작품이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맥신이 장르적으로 어떤 코드를 가졌는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고전 공포보다 분위기와 미학을 중시하는 지알로 무비 스타일
- 도덕적으로 단순하지 않은 주인공을 내세우는 네오누아르 서사 구조
- 실제 역사적 사건(나이트 스토커)을 플롯에 녹여낸 팩션(Faction) 기법
- 할리우드 영화 산업 내부를 자의식적으로 비트는 메타픽션 요소
미아 고스의 스타성, 각본이 받쳐주지 않아도 빛난다
이 영화의 도입부 오디션 장면은 상당히 좋았습니다. 맥신이 당당하게 등장해서 자신이 원하는 배역을 기어코 쟁취하는 그 시퀀스는, 캐릭터와 배우의 존재감이 완전히 일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아, 이 배우는 타고났구나"라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습니다. 미아 고스는 이 시리즈 전반에서 주연 외에도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복수 배역(Double Casting)을 소화했습니다. 복수 배역이란 한 배우가 동일 작품 또는 시리즈 내에서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방식으로, 배우의 변신 능력을 극한으로 시험하는 연출 전략입니다. 펄에서 보여준 광기 어린 감정 폭발과 맥신에서 보여주는 냉정하고 독한 생존 본능은 완전히 다른 색깔인데, 그 두 가지를 설득력 있게 소화한 것만으로도 미아 고스의 연기력은 충분히 증명됩니다.
다만 각본이 그 존재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맥신을 압박하는 존재의 정체, 즉 광신적 복음전도사인 아버지라는 설정이 이야기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데, 그 긴장감이 기대만큼 쌓이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감독 캐릭터인 엘리자베스 벤더(엘리자베스 데비키 분)와의 대립 구도를 중심 축으로 삼고, 맥신이 할리우드라는 시스템 안에서 어디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지를 정면으로 다뤘다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그 방향이 맥신이라는 캐릭터에 훨씬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미아 고스라는 배우 자체에 관심이 있다면, 이 영화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습니다.
할리우드 풍자와 결말이 말하려는 것
영화 도입부에 베티 데이비스의 말이 인용됩니다. 베티 데이비스는 "이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배우입니다. 이 인용은 영화 전체의 방향을 압축적으로 선언하는 장치인데, 여기서 알 수 있듯 맥신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성공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무엇을 잃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엔딩 장면에서 맥신은 목이 잘린 인공 머리 소품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서게 됩니다. 이 이미지는 꽤 직접적인 메타포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할리우드라는 시스템에 맞게 가공된 상품이 되어버린 맥신의 모습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죽이고, 살인마를 막은 영웅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습니다. 하지만 코카인에 여전히 의존하고,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감정 상태에 있습니다.
이 결말이 성공의 허무함을 그리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욕망을 끝까지 붙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욕망이 행복과 연결된다고 영화가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꽤 영리하게 판단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 산업 내에서 여성 배우가 겪는 착취 구조를 다룬 연구들을 보면, 이런 서사가 단순한 허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영화 산업의 성별 불평등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USC 어넨버그 포용 이니셔티브(Annenberg Inclusion Initiative)는 매년 할리우드 내 성별·인종 대표성 데이터를 발표하고 있습니다([출처: USC Annenberg Inclusion Initiative](https://annenberg.usc.edu/research/aii)). 영화 맥신이 설정한 1985년이라는 시대 배경이 그저 복고적 감성에서 고른 연도가 아니라는 점을 이런 맥락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 속 실화 연쇄살인마 나이트 스토커 설정과 관련해서도, 실제 리처드 라미레스 사건은 1984~85년 로스앤젤레스를 공포에 몰아넣은 사건으로 FBI 범죄 데이터베이스에도 기록된 미국 범죄사의 주요 케이스입니다([출처: FBI 범죄 통계 및 역사 자료](https://www.fbi.gov/history)). 이 실제 사건을 픽션의 공포 장치로 활용하는 방식이 불편하다는 의견도 이해하지만, 그 시대의 분위기를 증폭시키는 데에는 효과적으로 작동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맥신은 장르 코드가 맞아야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네오누아르와 지알로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꽤 인상적인 작품일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미아 고스의 연기와 시대 재현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수 있습니다. 저는 후자였습니다. 그래도 펄은 꼭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넷플릭스에 엑스가 하루빨리 올라오길 기다리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