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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만화를 보면서 진짜로 무서웠던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바로 이 극장판을 처음 봤을 때입니다. 2004년에 개봉한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12기, 폭풍을 부르는 석양의 떡잎마을 방범대는 겉으로는 유쾌한 서부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꽤 섬뜩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기억상실, 웃기려고 넣은 설정이 아닙니다

솔직히 처음 이 극장판을 봤을 때는 그냥 짱구가 서부극 세계에서 뛰어다니는 코미디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면 볼수록 이 작품의 핵심 공포는 총이나 악당이 아니라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에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영화 속 저스티스 시티에 갇힌 떡잎마을 주민들은 서서히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잊어갑니다. 여기서 이 설정을 애니메이션 이론으로 설명하자면 일종의 내러티브 정체성 붕괴(Narrative Identity Collapse)에 해당합니다. 내러티브 정체성이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고 그 연속성을 통해 자아를 유지하는 심리학적 개념으로, 이 연속성이 무너지면 사실상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보면서 불편했던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캐릭터들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걸 스스로 자각조차 못한다는 것. 기억을 잃는다는 것도 무섭지만, 잃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자연스럽게 적응해 버린다는 게 훨씬 더 무서웠습니다. 어린이 만화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이건 사실상 심리 스릴러에 가까운 전개입니다. 더 흥미로운 건 이 영화 자체가 미완성 서부극이라는 설정입니다. 완결되지 않은 영화가 자신을 완결 짓기 위해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빨아들인다는 발상인데, 제 경험상 이런 메타픽션적 구조를 극장판 애니에서 본 건 이게 처음이었습니다. 메타픽션이란 작품 자체가 허구임을 스스로 인식하고 그것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는 서사 기법으로, 보통 성인 문학에서 쓰이는 장치를 아동용 애니에서 구현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빌런,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극장판에서 저스티스 러브 시장은 단순히 권력욕에 눈먼 악당이 아닙니다. 그가 영화를 끝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영화가 끝나면 자신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오로지 그 미완성 영화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걸 알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다시 봤을 때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입체적인 동기를 가진 빌런이 짱구 극장판에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무력 면에서도 만만치 않은데, 음속에 가깝게 채찍을 휘두르는 장면이나 성인 남성을 한 손으로 들어 던지는 장면은 아이들 만화에서 보기 드문 위압감을 줍니다. 이 채찍 액션은 당시 극장판 시리즈에서도 손에 꼽히는 전투 시퀀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극장판에서 등장인물들의 포지션 구분도 꽤 정교합니다. 진실을 알리려는 자, 은폐하는 자, 속으론 착하지만 결국 악을 택한 자로 캐릭터들이 분류되어 있고, 그 결로 보면 철수의 역할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짱구의 절친인 맹구와의 우정이 명확하게 확인되는 것도 이 편이고, 결국 잘못된 선택을 했던 철수를 조건 없이 받아주는 떡잎마을 방범대의 모습은 보고 있으면 묘하게 뭉클합니다.

 

극장판 전체에서 이 작품이 잘하는 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서부극 클리셰(장르 관습)를 비틀면서도 충실히 따라가는 이중적인 구성
  • 조력자의 등장 타이밍처럼 뻔하지만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장르적 쾌감
  • 각 아이들의 캐릭터 특색을 살린 전투 시퀀스, 지금 다시 봐도 연출이 탁월합니다
  • 미완성 서부극이라는 메타픽션 장치로 서사 자체에 긴장감을 부여

 

일본 문화청이 선정한 미디어 예술 아카이브에 따르면 크레용 신짱 극장판 시리즈는 단순 오락성을 넘어 사회 풍자와 가족 관계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출처: 일본 문화청 미디어예술아카이브](https://mediaarts-db.bunka.go.jp)).

 

우정, 그리고 선아 누나 논쟁

이 극장판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장면은 사실 전투 시퀀스가 아닙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짱구와 선아 누나가 춤을 추는 장면입니다. 저는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 그냥 예쁜 마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그 씁쓸함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선아 누나가 영화 속 오리지널 캐릭터인지, 아니면 짱구네 강아지 흰둥이가 의인화된 존재인지를 두고 시청자들 사이에 꽤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어릴 때는 저도 흰둥이 설을 믿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해석 여부와 상관없이 이 캐릭터는 영화가 끝나면 사라지는 존재,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머무는 존재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 해석이 더 마음에 남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 전후로 등장하는 봉미선의 명장면, 국내에서는 일부 삭제 처리된 이른바 '다 잊어요 고향' 시퀀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폭력성 문제로 현재는 편집된 버전으로 유통되고 있는데, 그 장면이 삭제된 이유가 단순한 폭력 묘사 때문만은 아니라, 권력자의 무자비함을 아동 만화에서 꽤 직접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이 없어도 영화의 흐름은 충분히 전달되지만, 시장의 무서움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던 장면이었기에 아쉬움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비평 데이터베이스인 AniDB에서는 이 작품의 각본 구조를 두고 서부극 장르 관습(Genre Convention)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케이스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장르 관습이란 특정 장르가 반복적으로 사용해온 설정, 인물 유형, 서사 패턴의 집합을 말하는 것으로, 이 극장판은 그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아이들이 주인공이라는 역설로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출처: AniDB](https://anidb.net)).

 

결국 이 극장판이 지금까지도 짱구 시리즈 베스트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재밌어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기억, 정체성, 우정, 이별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어린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냈기 때문이겠죠. 한 번도 본 적 없으신 분이라면 지금 당장 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이미 보신 분이라면 선아 누나가 누구인지를 마음속으로 한 번 더 생각해 보시면서 다시 보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