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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만 관객을 동원한 2009년 영화 전우치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저는 기대를 반쯤 접고 들어갔습니다. 조선 도사가 현대 서울을 뛰어다닌다는 설정이 너무 만화 같아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이 영화는 그 황당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당당하게 밀어붙이는 배짱이 있었습니다.

악동이 먼저, 영웅은 나중
전우치는 시작부터 영웅의 냄새가 없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아니 정확히는 직접 보고 나니 이 인물이 왜 효과적인지 알게 됐습니다. 도술을 타고났지만 수행보다 장난이 앞서고, 의로운 마음은 있는데 그게 곧바로 품위 있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인물입니다. 임금을 앞에 두고 옥황상제 아들인 척 농락하는 장면에서 저는 처음으로 이 영화에 제대로 빠졌습니다. 여기서 둔갑술이라는 도술 개념이 등장합니다. 둔갑술이란 특정 인물이나 사물로 외형을 바꾸는 변신 계열 도술을 말합니다. 전우치는 부적을 매개로 이 술법을 구사하는데, 부적 한 장에 분신 하나가 소모되는 구조라 자원 관리가 전략의 핵심이 됩니다. 이 설정 덕분에 단순한 무적 캐릭터가 아니라 제약이 있는 인물로 느껴졌고, 그게 이야기의 긴장을 살려줬습니다.
강동원이 이 인물을 연기한 방식에서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능청이었습니다. 멋있게 보이려 힘주는 순간보다, 허세와 장난기가 섞인 순간이 훨씬 더 잘 살았습니다. 김윤석, 백윤식, 유해진 같은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 스크린 장악력을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강동원은 그 사이에서도 분명하게 자기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전우치가 500년 봉인에서 풀려난 뒤 2009년 서울을 처음 마주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습니다. 놀라거나 당황하기보다 금세 구경꾼처럼 적응해버리는 모습이, 이 캐릭터가 얼마나 뻔뻔하고 자유로운 인물인지를 대사 없이 보여줬습니다. 그때 느낀 건, 이 영화가 캐릭터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과 도술이 충돌하는 방식
조선 시대 설정과 현대 서울의 조합은 사실 무척 위험한 선택입니다. 어설프게 붙여놓으면 어느 쪽도 살지 않거든요. 그런데 전우치는 이 충돌을 오히려 영화의 얼굴로 만들었습니다. 도심 빌딩 사이로 도술이 흘러다니고, 요괴가 번화가를 뛰어다니는 장면들이 지금 기준으로도 꽤 인상적입니다. 당시 CG 기술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시각효과(VFX, Visual Effects)란 실사 촬영으로 담을 수 없는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하는 기법을 말하는데, 2009년 국내 기술 수준으로는 지금처럼 매끄러운 결과물을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경험상 이 투박함이 오히려 거슬리지 않았던 이유는, 최동훈 감독이 CG에 기대는 대신 리듬과 속도로 장면을 끌어갔기 때문입니다. 정교함보다 구경하는 맛을 앞세운 연출이었습니다.
영화 속 마지막 대결 장소가 영화 세트장인 것도 직접 보고 나서야 그 의도가 와닿았습니다. 감독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 선택은 "이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넘어 "이것이 영화냐 현실이냐"는 질문을 담은 것입니다. 판타지 활극을 찍으면서 그 허구성 자체를 테마로 끌어들인 셈인데, 꽤 야심 있는 연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연성 면에서도 이 영화는 생각보다 탄탄합니다. 초반에 나온 화살 장면이 전우치의 행동과 맞물려 다시 연결되고, 스승의 유언이 클라이맥스에서 정확하게 회수됩니다. 만파식적이라는 소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파식적이란 신라 시대 설화에 등장하는 신비의 피리로, 이를 불면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적이 물러간다는 전설 속 보물입니다. 영화는 이 소재를 요괴 통제 장치로 각색해 전체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삼았고, 그 설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유지됩니다.
전우치를 볼 때 주목해야 할 요소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만파식적을 둘러싼 전반부와 후반부의 구조적 대칭
- 초랭이의 배신과 복귀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욕심의 풍자로 기능하는 방식
- 서인경이 단순한 로맨스 상대를 넘어 표훈대덕의 환생으로 드러나는 반전의 복선 처리
- 영화 속 세트장 배경이 담고 있는 메타적 의도
강동원이 만든 것과, 영화 자체가 가진 것
이 영화를 두고 "강동원이 다 했다"는 말이 나오는 건 이해가 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면 주변 배우들의 무게가 상당합니다. 김윤석의 화담은 점잖은 얼굴 뒤에 욕망을 감추고 있는 인물인데, 그 서늘함을 과장 없이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괴였다는 반전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제가 직접 봤을 때 느꼈던 건, 이미 그 전부터 뭔가 미묘하게 이상하다는 감각을 심어뒀다는 것이었습니다.
유해진의 초랭이는 감초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코믹한 역할이지만 단순히 웃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전우치의 리듬을 살려주는 짝패입니다. 축지법이란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빠르게 이동하는 도술로, 넓은 거리를 단숨에 이동하는 개념입니다. 말로 변해 달리는 초랭이의 모습은 이 설정을 코미디로 풀어낸 장면인데, 유해진의 표정 연기 하나가 그 장면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한국 대중문화 속 히어로 서사는 꾸준히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자료에 따르면 2009년 이후 한국 판타지 장르 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꾸준히 상승세를 보였으며, 전우치가 그 흐름의 초반부에 위치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https://www.kocca.kr)). 망토 대신 도포, 초능력 대신 부적, 도심 속 요괴라는 조합은 외국 히어로물을 흉내 내지 않고 우리 방식으로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물이었습니다.
OST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왕을 농락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국악 어레인지는 훗날 이날치를 결성하는 장영규가 작곡한 것으로, 그 흥겨운 리듬이 장면의 완성도를 크게 끌어올립니다. 영화음악(OST, Original Sound Track)이란 영상의 분위기와 정서를 음악으로 강화하는 요소인데, 전우치의 국악 기반 어레인지는 판타지 설정과 맞물려 이 영화만의 특유한 공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제가 그 장면을 보면서 "아, 이건 OST가 연기를 하는 장면이다"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따르면 전우치의 최종 관객 수는 약 613만 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당시 아바타와 같은 시기에 개봉한 악조건에서 거둔 성과였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KMDb](https://www.kmdb.or.kr)). 전우치는 빈틈이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중반의 흐름이 다소 헐거워지는 구간도 있고, 일부 조연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채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 영화가 지금도 다시 틀고 싶어지는 이유는 한국식 상상력이 가장 자유롭게 달리던 순간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성도보다 배짱으로 기억되는 영화이고, 그 배짱이 지금 봐도 충분히 유효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지금도 볼 수 있으니, 한번도 안 보셨다면 왕 농락 장면만이라도 꼭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