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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러셀 크로우가 나온다고 해서 글래디에이터 같은 묵직한 액션 블록버스터를 기대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이건 완전히 다른 결의 영화였습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연출한 영화 노아는 성경의 방주 이야기를 뼈대로 삼되, 그 위에 인간의 심리적 붕괴와 환경주의적 메시지를 덧씌운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 원작 영화라고 하면 경건하고 묵상적인 톤을 떠올리기 쉬운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그 기대를 완전히 벗어납니다.

아로노프스키가 설계한 세계관과 시각적 스펙터클
저도 처음엔 이 영화가 종교 서사 영화의 문법을 따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프닝부터 카인의 후예들이 주도한 산업화로 황폐해진 지구가 등장하고, 타락 천사인 감시자들(Watchers)이 거대한 암석 괴물 형태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감시자들이란 구약 외경 중 하나인 에녹서(Book of Enoch)에 등장하는 타락 천사를 가리킵니다. 에녹서는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 위경으로, 성경의 공식 경전 외부에서 유통된 고대 문헌입니다. 아로노프스키는 이 자료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판타지 장르의 문법을 도입했고, 덕분에 이 영화는 재난 블록버스터이면서 동시에 다크 판타지이기도 합니다.
시각효과(VFX) 측면에서도 제가 직접 보면서 감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VFX란 컴퓨터 그래픽과 실사 촬영을 합성하여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기술입니다. 대홍수 장면에서 땅에서 물이 솟구치고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은 그 규모 자체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색감이 거칠고 황량하면서도 이상하게 자연스러워서 CG인 걸 알면서도 몰입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아로노프스키 특유의 타임랩스 시퀀스도 인상적이었는데, 타임랩스 시퀀스란 수십억 년의 시간 흐름을 단 몇 분 안에 압축해 보여주는 편집 기법입니다. 진화론적 시간 흐름과 창조론적 세계관을 교차 편집한 이 장면은 감독이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가 기술적 완성도를 인정받은 것은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제19회 새틀라이트상에서 미술상, 의상상, 음향상, 시각효과상 등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제41회 새턴상(Saturn Awards) 최우수 액션/어드벤처 영화 부문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출처: Saturn Awards](https://www.saturnawards.org)).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는 약 3억 6,20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했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https://www.boxofficemojo.com)).
이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눈여겨볼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VFX로 구현한 대홍수 장면과 방주 건조 시퀀스
- 에녹서 기반의 감시자들(암석 거인) 캐릭터 디자인
- 진화론·창조론을 교차 편집한 타임랩스 시퀀스
- 황폐한 대지와 에덴동산의 숲을 대비시킨 미술 설계
방주 안에서 무너지는 인간, 러셀 크로우의 연기
일반적으로 노아를 인류를 구한 성인(聖人)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인식이 완전히 흔들렸습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방주 내부라는 밀실 공간에서 벌어지는 심리전이 핵심입니다. 노아(러셀 크로우)는 창조주의 뜻이 인류의 완전한 멸종에 있다고 확신하며, 불임이었던 며느리 일라(엠마 왓슨)가 기적적으로 임신하자 태어날 아이가 딸이면 죽이겠다고 맹세합니다. 이 장면에서 밀실 공포증(Claustrophobia)적인 긴장감이 극에 달합니다. 밀실 공포증이란 폐쇄된 공간에서 느끼는 극단적 불안감으로, 이 영화는 방주라는 구조물 자체를 구원의 공간이 아닌 압박과 공포의 공간으로 재설계했습니다.
저는 두발가인(레이 윈스턴)이라는 악역 캐릭터에 대해서도 단순히 밉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발가인이 폭우 속에서 "창조주는 왜 나에겐 응답하지 않는가, 나도 삶을 주고 빼앗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신과 나는 다를 게 무엇인가?"라고 외치는 장면은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신이 생명을 선물하고 다시 거두는 것이 자기 뜻이라면, 그 선물을 받은 인간이 신을 원망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러셀 크로우의 연기는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요소였습니다. 신념에 사로잡혀 광기에 가까워지는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관객이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도록 인간적인 균열을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엠마 왓슨은 월플라워에서 봤던 것처럼 감정선이 섬세한 배우인데, 이 영화에서도 불임의 상처와 임신의 기쁨, 그리고 아이를 지키려는 절박함을 자연스럽게 끌어올렸습니다. 로건 레먼과 한 스크린에 있는 장면들은 월플라워를 기억하는 팬 입장에서 묘하게 반갑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영화가 일반 관객에게 엇갈린 반응을 받은 것도 이해합니다. 미국 극장 출구 조사 시네마스코어(CinemaScore)에서 C 등급을 기록했는데, 시네마스코어란 개봉일 당일 극장을 찾은 실제 관객이 A~F 등급으로 직접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재현을 기대한 관객층에게 이 영화의 판타지적 설정과 노아의 강박적 인물 묘사는 분명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면 평단은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 평론가 신선도 76%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종교 서사를 재현한 작품이라고 보기보다는, 신의 명령과 인간의 본능 사이에서 붕괴하는 한 인물의 심리극으로 접근할 때 훨씬 깊이 읽힙니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전작 더 웨일(The Whale)도 인상 깊었지만, 이 영화는 스케일과 철학적 밀도를 동시에 가져가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결이 다릅니다. 138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방주 안에서 벌어지는 후반부를 놓치면 이 영화를 반만 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분일수록, 그 익숙한 서사가 어떻게 비틀리는지 확인하는 재미가 있을 거라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