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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오열했다는 얘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각오하고 봤는데, 처음 몇 화는 생각보다 눈물이 덜 나더라고요. 그런데 마지막 화에서 결국 터지고 말았습니다. 부모님과 따로 보면서 카톡으로 실시간으로 반응을 나눴는데, 그 카톡 창이 어쩌면 이 드라마의 진짜 완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주어 제목이 품고 있는 것들, 그리고 작품을 만든 사람들
'폭싹 속았수다'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저도 표준어로 읽혀서 잠깐 멈칫했습니다. 표준어에서 '속다'는 기만당한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이게 제주 방언(濟州 方言)으로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제주어에서 '속다'는 '애쓰다', '수고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폭싹 속았수다'는 곧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방언이란 특정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언어 변이형을 뜻하는데, 같은 한국어임에도 형태는 같고 의미가 정반대인 경우가 존재한다는 게 이 제목 하나로 너무도 잘 드러납니다.
영문 제목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 역시 단순히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라는 영어 격언, 즉 역경을 기회로 바꾸라는 의미의 관용구(慣用句)를 제주도의 특산물인 귤로 치환한 표현입니다. 관용구란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진 특유의 표현 방식을 뜻하는데, 이 제목 하나에 제주라는 공간성과 드라마의 정서가 동시에 담긴 셈입니다. 제목 하나를 두고 이렇게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요.
이 드라마의 극본은 임상춘 작가가, 연출은 김원석 감독이 맡았습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기다린 이유는 솔직히 캐스팅보다 임상춘 작가 석 자였습니다. '동백꽃 필 무렵'과 '쌈, 마이웨이'를 부모님과 함께 본 경험이 있는데, 그 온기가 너무 좋았거든요. 소주 대여섯 병은 들어가겠다며 튼튼하다고, 에코백에 꼬동만이 빽사주는 남자라고 행복해하는 캐릭터, 12억짜리와 비교당하는 상황에서도 매일 꽃을 받고 만둣국값 안 받는 사이가 럭셔리하다고 말하는 캐릭터. 이런 소소한 행복과 낭만을 보여주는 방식이 작가님 특유의 언어입니다.
김원석 감독은 '미생', '시그널', '나의 아저씨' 등을 연출한 감독으로, 아이유와는 '나의 아저씨' 이후 두 번째 협업입니다. 미술감독을 맡은 류성희 감독은 '헤어질 결심'으로 칸 영화제 기술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분입니다. 제작비는 약 600억 원 규모로, 단순히 돈을 많이 쓴 게 아니라 경북 안동과 강원도 연천 등지에 대규모 야외 세트를 조성하면서 시대별 공간을 실제로 구현해낸 결과입니다.
제주도 내 주요 촬영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성산일출봉: 애순이 강제로 삼천배를 올리는 장면, 웅장한 바위 절벽과 제주 바다가 배경
- 김녕해변: 해녀 동료들의 물질 장면, 에메랄드빛 바다와 어촌 분위기
- 제주목관아: 제주 전통 행정 중심지, 시대 배경 구현
- 올래길 12코스 생이기정 해안도로, 성읍 민속마을, 제주 돌 문화공원
제주도 밖에서도 도동리 마을 세트는 경북도청 신도시 유휴부지에, 유채꽃밭 첫 키스 장면은 전북 고창군 학원농장에서, 깐느극장은 광주 충장로의 광주극장에서 각각 촬영되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나에게 유독 크게 울린 이유
저도 처음엔 이렇게까지 마음이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출장 중 포항 숙소에서 큼지막한 TV로 눕혀서 보다가, 마지막 화 보고 서울역에서 집 가는 지하철에서 눈물을 찍었습니다. 카톡으로 엄마가 보낸 반응을 다시 읽다가 막화의 슬픔이 다시 밀려온 것입니다. 모성(母性)이나 부모의 사랑을 신성시하고, 그것이 반드시 있어야 정상이라는 논조에는 단호하게 반대하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가 크게 다가온 것은, 어쩔 수 없이 한국적인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유년 시절은 금명이네와 꽤 비슷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야 처음 핸드폰이 생겼고, 남들 다 네비게이션 쓸 때 종이지도를 펼쳐 들고 길을 나섰으며, 노스페이스도 뉴발란스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이 지금 따뜻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빠와 동네 지도를 만들며 골목을 걸었던 기억이나 신문지를 돌돌 말아 함께 집을 세웠던 기억 때문입니다. 카렌스 트렁크를 캠핑카라고 부르며 컵라면 끓여 먹었던 국내여행도 마찬가지고요. 불편함을 추구하면서도 자식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던 그 마음이, 지금 제가 딛고 있는 바닥의 재료입니다.
'폭싹 속았수다'는 임상춘 작가 장편 드라마의 계보, 즉 '쌈, 마이웨이'부터 '동백꽃 필 무렵'을 거쳐 이어지는 흐름에서 부모의 사랑을 주제 자체로 끌어올린 작품입니다. 3대에 걸친 서사 구조, 즉 서사시적 구성(敍事詩的 構成)을 통해 한 가족의 60여 년을 담아냈는데, 여기서 서사시적 구성이란 한 인물이나 가문의 생애를 긴 시간 축에 걸쳐 조망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국내 드라마가 이 방식으로 성공한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시도 자체가 의미 있습니다.
명대사들도 그냥 예쁜 문장이 아닙니다. "소중한 이가 아침에 나갔던 문으로 매일 돌아오는 것. 그건 매일의 기적이었네"나 "당신 없어도 계신 줄을 압니다. 이제는 내게도 아랫목이 있어, 당신 생각만으로도 온 마음이 데워지는 걸" 같은 대사는 특정 장면과 맞물려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제가 무에 빗댄 대사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홀라당 까먹어서 대본집이 정말 필요하다고 느꼈을 정도입니다.
콘텐츠 소비 방식과 드라마 몰입도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가족이나 친밀한 관계의 타인과 함께 콘텐츠를 시청할 때 정서적 반응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https://www.kocca.kr)). 제가 부모님과 카톡으로 실시간 반응을 나누며 봤던 경험이 딱 그것이었습니다. 또한 넷플릭스 공개 이후 해당 드라마가 비영어권 드라마 글로벌 시청 순위 상위권에 진입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출처: Netflix 공식 Top 10](https://www.netflix.com/tudum/top10)).
임상춘 작가님이 또 어떤 작품으로 돌아오실지, 이미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도 분명 부모님 모셔다 놓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결국 이 드라마가 저한테 남긴 건 애순이와 관식이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인 것 같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이라면, 가능하면 혼자보다 누군가와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그게 이 드라마를 제대로 완성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