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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드라마가 공개될 때마다 늘 그렇듯, 저도 반신반의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솔직히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리리 윌리엄스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걸렸거든요. 그런데 직접 끝까지 다 보고 나서, 생각이 꽤 달라졌습니다. 이 작품이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그리고 실제로 무엇을 보여줬는지 냉정하게 짚어보겠습니다.

히어로 성장서사인가, 피카레스크인가
아이언하트를 보기 전에 저는 단순히 "토니 스타크의 후계자가 슈트를 만들고 히어로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전혀 달랐습니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히어로 서사보다는 피카레스크(picaresque) 구조에 훨씬 가깝습니다. 피카레스크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주인공이 사회의 밑바닥이나 회색지대를 떠돌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사 형식으로, 흔히 반영웅이나 빌런의 성장담에 자주 쓰이는 구조입니다.
리리 윌리엄스는 15세에 MIT에 입학한 천재지만,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그녀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결함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굴러간다는 점이었습니다. 낮은 자존감과 지나치게 높은 자존심, 그리고 뚜렷한 피해의식이 그녀를 계속해서 잘못된 선택으로 이끌죠. MIT에서 퇴학당하고, 실험용 슈트를 훔쳐 시카고로 돌아가는 초반부만 봐도 이미 전통적인 히어로와는 결이 다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갈등 구조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빌런 파커 로빈스, 더 후드입니다. 앤서니 라모스가 연기한 이 인물은 안트로픽 서사(anthropic narrative), 즉 평범한 사람이 외부 요인에 의해 극단적으로 변화하는 서사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는 마법적 힘을 지닌 후드를 착용해 투명화, 물리 법칙 왜곡 같은 초자연적 능력을 얻고, 그 힘을 순수하게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리리에게 슈트 제작 자금을 대주겠다며 조직 합류를 제안하는 그의 설정은, 이 드라마가 단순한 히어로물이 아니라는 신호를 이미 초반에 보내고 있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이 작품의 진짜 문제는 그 구조 자체가 아니라 그 구조를 충분히 설득력 있게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리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슈트를 사용하는 장면 대부분이 자기 문제를 해결하거나 범죄에 가담하는 데 집중됩니다. 감정적 동기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녀에게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로튼토마토 최종 점수가 53%로 재하락한 것도 이 지점에서 설득력을 잃은 시청자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출처: Rotten Tomatoes](https://www.rottentomatoes.com)).
아이언하트의 서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초반: 퇴학 후 시카고 귀환, 슈트 완성을 향한 집착
- 중반: 더 후드와의 거래, 목적을 위해 윤리를 타협하는 선택
- 후반: 오베디아 스탠의 아들 에제키엘 스탠의 등장, 서사의 추가 분기
- 결말: 메피스토와의 계약, 사실상 빌런 전환 확정
MCU 확장의 발판, 메피스토 등장의 의미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두 번 놀랐습니다. 첫 번째는 오베디아 스탠의 아들 에제키엘 스탠이 등장했을 때고, 두 번째는 메피스토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입니다. 에제키엘 스탠은 MCU의 레트콘(retcon) 기법을 잘 활용한 캐릭터입니다. 레트콘이란 기존 설정을 소급하여 수정하거나 새롭게 해석하는 창작 기법으로, 이미 확립된 세계관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할 때 씁니다. 오베디아의 사망이 공식적으로는 비행기 사고로 처리되어 있다는 설정은 아이언맨 1편을 다시 보게 만들 만큼 흥미로운 디테일이었습니다. 올든 에런라이크가 연기하는 이 캐릭터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흑화하는 과정이 나름의 개연성을 갖추고 있어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리고 메피스토의 등장은 이 드라마 전체를 다른 맥락에서 보게 만드는 핵심 장치입니다. 파커 로빈스가 착용한 마법 후드가 메피스토가 제공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가 여러 인물들과 유사한 거래를 반복해왔다는 설정은 MCU의 파우스트적 서사(Faustian narrative)를 본격적으로 열겠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파우스트적 서사란 목적을 위해 악마와 계약을 맺고 그 대가를 치르는 이야기 구조로, 마블 코믹스에서는 원 모어 데이(One More Day)가 대표적입니다.
결말에서 리리 역시 메피스토와 거래를 맺는 선택을 합니다. 여기서 저는 마블이 의도적으로 리리를 빌런 포지션에 놓으려 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마블 스튜디오 측에서도 실제로 이 캐릭터를 월터 화이트나 토니 소프라노 같은 피카레스크 드라마의 주인공들과 비교한 바 있는데, 그 방향성이 결말에서 명확해졌습니다. 문제는 그 타락의 과정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쌓이지 않았다는 점이고, 그래서 결말의 충격이 감동보다는 당혹감으로 느껴지는 시청자가 많았던 겁니다.
IGN이 5/10을 주며 "MCU에 대한 냉소적인 추가"라고 평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출처: IGN](https://www.ign.com)). 세계관 확장의 발판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발판을 놓는 과정이 너무 매끄럽지 못했다는 거죠. 제가 보기에도 중반 이후 카마르 타지 수련생 같은 마법 요소가 뜬금없이 개입되면서 리리가 어디쯤에 서 있는 캐릭터인지 모호해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메피스토라는 캐릭터가 MCU에 본격 편입됐다는 사실만큼은 페이즈 5의 마지막 드라마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앞으로 리리가 슈리와 대립하거나, 할리 키너가 차기 아이언맨 후계자로 정립되면서 리리와 맞서는 구도가 만들어진다면 이 작품의 역할이 재평가받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이언하트는 완성된 히어로 서사이기보다는 발화점에 가깝습니다. 메피스토라는 거대한 축을 MCU에 심어놓은 것은 분명한 성과지만, 그 그릇인 리리 윌리엄스를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한 채로 결말을 맞이한 것이 아쉽습니다. 빌런 서사로 보면 꽤 흥미롭고, 히어로 서사로 보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두 가지 관점 중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평가가 나오는 작품입니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셨다면, 리리를 히어로가 아닌 파멸로 가는 인물로 두고 감상해 보시길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