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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다비전을 정주행하고 바로 팔콘과 윈터솔져를 틀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이게 영화급이 되겠어?"라는 의심이 있었는데, 6화를 다 보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단순한 히어로 액션이 아니라 미국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해온 문제들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드라마,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봐야 할까
팔콘과 윈터솔져를 처음 접하면 주인공이 당연히 샘 윌슨과 버키 반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6화를 다 보고 나서 느낀 건, 이 드라마의 진짜 중심에는 존 워커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게 예상 밖이어서 오히려 더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존 워커는 MOH(Medal of Honor) 수훈자입니다. MOH란 미국 의회가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무공훈장으로,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뛰어난 전공을 세운 군인에게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제가 이 설정을 처음 봤을 때는 "그러면 충분히 캡틴이 될 자격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다 보면, 능력과 자격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알게 됩니다.
그는 정부가 공식 임명한 두 번째 캡틴 아메리카입니다. 뛰어난 군인이지만 슈퍼 솔저(Super Soldier)는 아닙니다. 슈퍼 솔저란 슈퍼 솔저 혈청(Super Soldier Serum)을 투여받아 인간의 신체 한계를 초월한 능력을 갖춘 존재를 말합니다. 스티브 로저스가 대표적인 케이스고, 이 혈청을 둘러싼 갈등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합니다. 존 워커는 혈청 없이 방패를 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팔콘 샘 윌슨과 사실 처지가 비슷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말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립니다. 그 차이가 뭔지 생각해보면, 이 드라마가 하려는 말이 보입니다.
팔콘과 윈터솔져에서 제가 특히 주목한 캐릭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샘 윌슨: 방패의 무게를 처음엔 내려놓지만, 끝에서 진정한 의미를 받아들이는 인물
- 버키 반즈: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극복과 속죄의 서사를 동시에 짊어진 인물
- 존 워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극단으로 흘렀을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반면교사
- 이사야 브래들리: 미국이 감추고 싶어 했던 역사적 진실을 상징하는 인물
- 샤론 카터: 국가에 배신당한 이후 자신만의 생존 논리를 택한 인물
방패의 무게, 그냥 상징이 아닙니다
혹시 "방패를 물려받는 장면이 그냥 의식(ceremony) 아닌가?"라고 생각하셨다면,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봤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브래들리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방패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집니다.
이사야 브래들리는 1950년대 한국전쟁에 흑인 슈퍼 솔저로 파병된 인물입니다. 혈청을 투여받아 전장에서 살아남았지만, 미국 정부는 그를 영웅으로 대우하는 대신 30년간 비밀 감금 상태에서 추가 생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흑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샘 윌슨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은, 드라마 전체에서 제가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입니다. 미국 사회의 구조적 인종차별을 다루는 학술 연구들은 이러한 역사적 불평등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출처: 스미소니언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문화박물관](https://nmaahc.si.edu)).
방패를 처음 박물관에 기증하는 샘의 선택이 단순한 겸손함이 아니라는 게 이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흑인으로서 별과 줄무늬를 상징하는 방패를 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 무게를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이 부분을 보면서 "이건 그냥 히어로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처음 든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MCU(Marvel Cinematic Universe), 즉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페이즈 4는 페이즈 3까지와 달리 개별 인물의 내면과 사회적 맥락을 깊이 파고드는 방향으로 전환했습니다. 팔콘과 윈터솔져는 그 전환점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초능력으로 도시를 구하는 장면보다, 정치인 앞에서 연설하는 샘의 장면이 더 강하게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버키의 서사도 방패 못지않게 묵직합니다. 그는 윈터솔져 시절 자신이 저지른 행위들을 정신건강의학과 치료, 즉 심리치료를 통해 직면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피해자들에게 직접 찾아가 사죄하는 장면들은 PTSD 회복 과정을 꽤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와칸다에서 제작한 비브라늄 기계 팔, 그리고 화이트 울프라는 새 코드네임은 그가 윈터솔져라는 과거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가 MCU 세계관에서 갖는 위치
팔콘과 윈터솔져를 보고 나서 드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단독으로 완결되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더 큰 이야기의 출발점인가?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봅니다. MCU의 페이즈 구조는 각 작품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더 큰 서사 흐름에 연결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팔콘과 윈터솔져는 캡틴 아메리카 4편의 직접적인 전편 역할을 합니다. 샘 윌슨이 새 캡틴 아메리카로서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비기닝 스토리입니다.
플래그 스매셔(Flag Smashers)라는 조직의 등장도 이 맥락에서 흥미롭습니다. 플래그 스매셔는 블립(Blip) 이후의 세계 질서에 반발하는 집단입니다. 블립이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절반의 인류가 사라졌다가 5년 후 되돌아오는 사건을 말합니다. 5년 동안 세상이 변해버렸는데 갑자기 모든 게 원상복구되니, 그 사이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과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생깁니다. 이 현실적인 설정이 판타지 느낌을 많이 걷어냈고, 마블영화에서 보기 어렵던 난민과 이주민 문제를 전면에 꺼내는 계기가 됩니다.
제모 남작(Baron Zemo)의 활용도 잘 됐습니다. 시빌워에서 어벤져스를 내부에서 무너뜨린 두뇌형 빌런이 다시 등장해 슈퍼 솔저 혈청을 추적하는 흐름은, 기존 MCU를 어느 정도 본 분들이라면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다만 사전 시청 없이 보면 제모의 동기나 감정선을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마블 스튜디오(Marvel Studios)는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통해 극장판에서 다루기 어려운 사회적 주제들을 시리즈 포맷으로 풀어내는 시도를 본격화했습니다([출처: 마블 스튜디오 공식 사이트](https://www.marvel.com)). 팔콘과 윈터솔져는 그 시도 중에서 가장 현실 밀착형 작품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완다비전이나 로키에 비해 판타지적인 요소가 적어서 초반에 조금 심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슈퍼 솔저끼리 싸우면 결국 몸 좋은 사람들끼리 치고받는 거라, 시각적 쾌감이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화 내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완다비전을 재밌게 봤다면 팔콘과 윈터솔져도 충분히 볼 만한 작품입니다. 다만 더 몰입하고 싶다면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와 시빌워를 먼저 보고 오시길 권합니다. 맥락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의 차이가 꽤 큽니다. 캡틴 아메리카 4편이 개봉되면, 이 드라마가 얼마나 촘촘한 포석이었는지 더 명확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