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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브리저튼 시즌1을 보다가 중간에 그냥 껐습니다. 앞부분이 너무 지루해서요. 그랬다가 주변의 강력한 권유로 시즌3를 먼저 틀었는데, 이게 웬걸 — 한 주 만에 8화를 다 봤습니다. 클리셰 로맨스인 걸 알면서도 손을 못 뗐다는 게 이 드라마의 진짜 힘인 것 같습니다.

시즌3가 먼저 봐도 되는 이유 — 공개 구조와 배경

브리저튼 시즌3는 줄리아 퀸의 원작 소설 로맨싱 미스터 브리저튼(Romancing Mister Bridgerton)을 원작으로 합니다. 이 소설은 브리저튼 시리즈 4권에 해당하는 작품인데, 드라마 제작진은 원작 출간 순서와 달리 베네딕트 편보다 콜린과 페넬로페의 이야기를 먼저 선보이는 선택을 했습니다. 앞 시즌에서 이미 두 캐릭터의 감정선이 충분히 쌓였기 때문에 타이밍상 맞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시즌은 파트1(1~4화)을 2024년 5월 16일에, 파트2(5~8화)를 6월 13일에 나눠 공개했습니다. 이처럼 한 시즌을 두 파트로 분할 공개하는 방식을 넷플릭스에서는 스플릿 드롭(Split Drop)이라고 부릅니다. 스플릿 드롭이란 전체 에피소드를 한꺼번에 올리지 않고 시기를 나눠 공개함으로써 시청자의 관심을 더 오래 붙잡아두는 전략입니다. 브리저튼 시즌3가 정확히 이 방식을 택했고, 파트1이 끝난 뒤 한 달 가까이 팬들이 온라인에서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효과는 분명했습니다. 저처럼 시즌1~2를 건너뛰고 3부터 보는 분들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앞 시즌의 사건이 언급되긴 하지만, 인물 관계는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파악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페넬로페와 콜린 — 친구에서 연인까지의 감정 변화

이 시즌의 핵심은 두 주인공의 관계 변화입니다. 페넬로페 페더링턴은 시즌1부터 콜린 브리저튼을 짝사랑해왔지만, 콜린이 친구들에게 "페넬로페와 로맨스라니, 절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듣고 마음을 접습니다. 시즌3는 바로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시즌3의 페넬로페는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푸른 계열의 드레스로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고, 자신에게 맞는 남편감을 찾겠다며 사교계에 능동적으로 나섭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꽤 인상을 받은 것이, 단순히 외모가 변한 게 아니라 눈빛 자체가 달라 보였거든요. 배우 니콜라 코클란이 캐릭터의 내면 변화를 눈에 보이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연기력이 상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콜린은 여행에서 돌아와 자신을 냉랭하게 대하는 페넬로페를 보고 당황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를 다시 가까이 하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우정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델라크루아 부인의 무도회에서 데블링 경이 페넬로페와 춤추는 장면을 지켜보다 느끼는 질투심 — 이 장면이 콜린 캐릭터가 본격적으로 바뀌는 전환점입니다. 이후 마차 안에서의 키스 신은 파트1의 클라이맥스인데, 솔직히 이 장면 하나 때문에라도 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레이디 휘슬다운 — 정체 공개가 만든 서사의 긴장

브리저튼 시즌3에서 가장 집중해서 봐야 할 서사 축은 단연 레이디 휘슬다운(Lady Whistledown) 정체 문제입니다. 레이디 휘슬다운이란 런던 사교계의 가십과 비밀을 폭로하는 익명의 사교계 소식지 작가를 말하며, 이 정체가 사실 페넬로페라는 것이 이미 시즌2 말미에 절친 엘로이즈에 의해 들통납니다.

 

시즌3에서는 이 비밀이 더 큰 위협으로 발전합니다. 크레시다 카우퍼가 자신이 휘슬다운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고 현상금을 노리다가, 결국 인쇄소에서 얻은 단서로 진짜 주인이 페넬로페임을 알아챕니다. 그녀는 이를 협박 수단으로 1만 파운드를 요구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콜린이 페넬로페의 방에서 원고를 발견하면서 약혼자에게도 배신감을 주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드라마가 짚어내는 지점이 꽤 흥미롭습니다. 페넬로페가 휘슬다운으로서 사용한 서사 전략은 일종의 프레이밍(Framing) 기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레이밍이란 동일한 사건을 어떤 관점으로 서술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인식이 달라지게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기법입니다. 페넬로페는 그 기법을 무의식적으로 활용해 사교계를 수년간 쥐락펴락했습니다. 19세기 배경에서 여성이 익명으로 이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설정 자체가 드라마의 가장 영리한 부분입니다.

 

미디어 콘텐츠에서 여성 캐릭터의 자아 정체성 탐색 서사는 시청자 몰입도를 높이는 핵심 요소로 분석됩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https://www.kocca.kr)). 페넬로페가 '휘슬다운'이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서사 무게를 갖습니다.

 

결말과 다른 캐릭터들 — 해피엔딩의 조건

파트2의 결말은 예상보다 훨씬 통쾌했습니다. 페넬로페는 여왕 주최 무도회에서 스스로 레이디 휘슬다운임을 공개 선언합니다. 사교계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이 장면은, 숨겨온 비밀의 무게를 스스로 내려놓는 캐릭터 성장의 정점입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찔끔 났는데, 그만큼 페넬로페의 여정에 감정이입이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샬럿 왕비가 페넬로페의 용기와 재능을 인정하고 활동 지속을 허락한다는 설정도, 권력자가 여성 창작자를 제도권 안에서 공인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콜린 역시 갈등 끝에 아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아들을 낳으며 진짜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다른 캐릭터들의 결말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프란체스카 브리저튼: 존 스털링 백작과 결혼 후 스코틀랜드 이주
  • 엘로이즈: 페넬로페와의 우정이 깨진 채 프란체스카를 따라 스코틀랜드행
  • 베네딕트: 틸리 아놀드와 관계를 맺으며 폴리아모리(다자연애)를 경험, 자신의 정체성 탐색
  • 크레시다 카우퍼: 협박 실패 후 웨일스 시골로 추방

 

특히 베네딕트의 서사가 눈에 띕니다. 폴리아모리(Polyamory)란 여러 사람과 동시에 감정적·낭만적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당사자 모두의 동의가 전제된 다자연애를 말합니다. 19세기 배경의 드라마에서 이 주제를 꺼냈다는 것은 제작진이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 현대적 가치관을 의도적으로 녹여낸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다양한 관계 형태와 성 정체성을 시리즈 전반에 걸쳐 다루고 있으며, 이는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의 콘텐츠 다양성 전략과도 맞닿아 있습니다([출처: Netflix 공식 뉴스룸](https://about.netflix.com)).

 

전체적으로 시즌3는 시즌1보다 이야기의 결이 더 섬세합니다. 로맨스 자체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을 찾아가는 페넬로페의 여정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달달한 장면만 기대했다면 살짝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영상미와 의상, OST 하나하나가 워낙 수준급이라 보는 내내 눈이 즐거웠습니다. 시즌4에서는 한국계 배우가 여주로 등장한다고 하니, 그쪽도 곧 정주행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