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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인간보다 더 인간답다면, 과연 인간이라는 정의는 무엇일까요. 웨스트월드 시즌 4 마지막 화를 보고 나서 저는 한동안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SF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켰다가, 4개 시즌 내내 머리를 부여잡고 보게 된 작품입니다. 그 경험을 지금부터 풀어보겠습니다.

조나단 놀란이 만든 반전의 세계
웨스트월드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순전히 감독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동생, 조나단 놀란이 연출을 맡았다는 소식에 바로 첫 화를 틀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형제의 연출 DNA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의 특징인 비선형 서사와 반전이 웨스트월드에도 그대로 녹아 있었습니다.
웨스트월드의 배경은 미래의 테마파크입니다. 델로스라는 기업이 운영하는 이곳에는 인간과 외형상 전혀 구별되지 않는 안드로이드, 즉 '호스트'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하루 4만 달러를 지불하고 이 공간에서 법적·도덕적 제약 없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호스트들은 매일 같은 루프(loop)를 반복합니다. 여기서 루프란 호스트가 하루 단위로 동일한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다시 수행하도록 설계된 반복 행동 패턴을 의미합니다. 죽어도 리셋되고, 기억도 초기화됩니다.
그런데 시즌 1에서 가장 오래된 호스트인 돌로레스가 이 루프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단순한 오작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판단이 얼마나 틀렸는지는 시즌 1 마지막화에서 곧바로 깨달았습니다.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질문
웨스트월드를 SF 드라마로만 분류하기에는 담겨 있는 철학적 무게가 상당합니다. 제가 직접 시청하면서 가장 강하게 느꼈던 부분이 바로 자유의지(free will) 개념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유의지란 외부의 강제나 결정론적 법칙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드라마는 이 질문을 호스트에게만 던지지 않습니다. 시즌 3에서 현실 세계로 배경이 옮겨지면 르호보암(Rehoboam)이라는 거대 인공지능 시스템이 등장합니다. 르호보암이란 태어나는 모든 인간의 행동 패턴과 잠재적 위험성을 분석해 그 사람의 인생 경로를 사실상 사전에 결정해버리는 예측 알고리즘 시스템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들도 이미 보이지 않는 루프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이 설정을 보면서 저는 구글의 대규모 언어 모델이나 빅데이터 기반 행동 예측 기술이 떠올랐습니다. 현재 기술 수준에서는 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AI 기술이 가속화되는 속도를 보면 드라마의 설정이 마냥 공상으로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인공지능 연구 분야에서는 이처럼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제어하는 시스템의 윤리적 위험성을 '정렬 문제(alignment problem)'라고 부르며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tificial-intelligence/)). 돌로레스가 르호보암을 파괴하기로 결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호스트와 인간 모두를 통제에서 해방시키려 했던 겁니다. 그 의도를 알고 나서 돌로레스라는 캐릭터를 다시 바라보게 됐습니다.
서브라임과 인셉션이 교차하는 지점
웨스트월드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개념은 서브라임(Sublime)이었습니다. 서브라임이란 드라마 내에서 호스트들의 의식 데이터가 업로드되는 디지털 낙원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육신은 소멸해도 의식(pearl)은 이 가상 공간에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설정인데, 이는 기독교의 영생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펄(pearl)이란 호스트의 두뇌 역할을 하는 구형의 데이터 저장 장치를 의미합니다. 인간으로 치면 뇌와 기억 전체를 담은 물리적 매체입니다. 돌로레스가 공원을 탈출할 때 자신의 것을 포함해 다섯 개의 펄을 챙겼다는 설정이 이후 시즌 전반의 핵심 복선이 됩니다.
제 경험상 이 서브라임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바로 떠오른 작품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이었습니다. 인셉션에서는 꿈속의 꿈이라는 다층 구조가 "지금 내가 경험하는 현실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웨스트월드는 한 발 더 나아가 "지금 나라는 존재가 진짜 나인가"를 묻습니다. 시즌 4에서 호스트들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과 동일한 외형과 기억을 가진 존재가 눈앞에 있을 때, 정체성의 근거 자체가 붕괴되는 겁니다.
웨스트월드가 제기하는 핵심 질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루프 밖으로 나온 의식은 자유의지를 가진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프로그램인가
- 인간의 의식을 완벽히 복제한 호스트는 법적·윤리적으로 인간과 동등한 존재인가
- 서브라임처럼 디지털 공간에 업로드된 의식은 죽음 이후에도 '나'로 볼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드라마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시즌 4 결말이 남긴 것들
솔직히 시즌 4는 시즌 1, 2에 비해 전개가 다소 급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샬롯이 나노바이러스를 품은 파리로 인간들을 감염시키고 뉴욕을 통제하는 설정은 스케일 면에서는 압도적이었지만, 캐릭터들의 감정선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채 사건들이 전개된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4 최종화의 결말은 꽤 오래 여운이 남았습니다. 호스트 윌리엄이 반란을 일으키고, 대부분의 인간과 호스트가 멸종에 가까운 상태에 이릅니다. 샬롯이 돌로레스의 펄을 서브라임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며 막을 내리는 장면은 "이게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신호처럼 읽혔습니다. 의식 전송(mind uploading)이라는 개념이 핵심인데, 이는 인간의 신경망 데이터를 디지털 매체에 이식해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도 존속시키는 기술 개념입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현재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연구에서 실제로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출처: Humanity+ (트랜스휴머니즘 연구 단체)](https://humanityplus.org/)).
아쉽게도 시즌 5는 제작이 취소되었습니다. 서브라임을 무대로 한 인간과 호스트의 공존 서사가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만큼, 그 결정이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4개 시즌을 모두 마치고 나서 저는 웨스트월드에 별 다섯 개 중 네 개 반을 주고 싶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시즌 3, 4로 갈수록 서사의 밀도가 다소 약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시즌 1, 2에서 쌓아 올린 철학적 깊이와 반전의 완성도만으로도 충분히 남은 반 개를 납득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단순한 오락용 드라마가 아니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생각하게 만드는 콘텐츠를 찾고 있다면, 웨스트월드는 그 기준을 충분히 충족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