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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실 이야기라면 솔직히 좀 멀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피터 모건이 제작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크라운을 처음 틀었을 때, 30분도 안 돼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왕관을 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우리와 닮아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렇게까지 이질적일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요.

역설적 매력 — 같은 인간인데 왜 이렇게 낯선가

더 크라운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이겁니다. 저 사람들도 싸우고, 사랑하고, 후회하는데, 왜 나는 계속 이질감을 느끼는 걸까?

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매력은 바로 그 역설에 있습니다. 사적인 장면에서 왕실 인물들은 놀라울 만큼 우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이 별것 아닌 이유로 냉전을 벌이는 장면, 마거릿 공주가 담배를 물고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장면은 드라마가 아니라 주변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직접 봐보니, 이 장면들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공감됐습니다. 저건 왕실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사람 이야기구나, 싶어서요.

 

그런데 공적인 장면으로 넘어가는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드라마가 다루는 갈등 구조를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필립 공의 성씨 문제가 있습니다. 서양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엘리자베스와 필립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필립의 성씨 '마운트배튼'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문제 하나로 내각 전체가 들썩이고, 결국 '윈저'라는 왕가의 성씨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납니다. 우리 기준에서는 가족 내 사소한 의사결정인 성씨 선택이, 왕실에서는 국가 정체성을 건드리는 사안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지점이 더 크라운이 만들어내는 역설적 매력의 정체입니다. 동질감과 이질감이 한 장면 안에 공존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를 가진 드라마는 흔하지 않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가 요직이 선거라는 공적 합의로 결정됩니다. 심지어 민간 영역에서도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영국 왕실은 혈통이라는 선천적 조건으로 지위가 결정됩니다. 이 전근대적인 제도가 지금도 작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현대인에게는 낯섭니다. 더 크라운은 그 낯섦을 비판하거나 옹호하지 않고, 그냥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그래서 보는 쪽이 더 오래 생각하게 됩니다.

 

더 크라운이 만들어낸 역설적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사적인 장면에서는 극도의 인간적 동질감을 유발한다
  • 공적인 장면에서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무게감이 등장한다
  • 이 두 층위가 교차하면서 시청자의 감정을 계속 흔든다

 

더 크라운이 에미상(Emmy Awards) 드라마 시리즈 부문 작품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에미상이란 미국 텔레비전 예술과학아카데미(Television Academy)가 매년 수여하는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상으로, 드라마 시리즈 작품상은 그중에서도 가장 경쟁이 치열한 부문입니다. 단순한 역사 재현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보편적 갈등을 짚어냈기 때문에 이 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출처: Television Academy](https://www.televisionacademy.com)).

 

미장센 — 이 드라마는 눈으로도 읽힙니다

더 크라운에서 두 번째로 저를 붙잡은 건 영상 자체였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틀었는데, 첫 장면부터 화면 색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영화·드라마 용어로, 한 장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의상, 세트, 배우의 위치와 움직임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카메라가 찍기 전에 화면에 담길 모든 것을 설계하는 작업입니다. 더 크라운은 이 미장센의 밀도가 보통 드라마와 차원이 다릅니다.

 

먼저 색 보정(color grading) 방식이 독특합니다. 색 보정이란 촬영된 영상의 색조와 명암을 후반 작업에서 조정하는 기술로, 드라마의 시대적 분위기와 인물의 감정 상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더 크라운의 초반 시즌은 차갑고 절제된 색조를 유지하는데, 이것이 엘리자베스 2세의 감정을 억누르는 내면 상태와 맞물려서 더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색감이 단순한 미적 선택이 아니라 인물의 심리 상태를 코딩해놓은 것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의상 디테일도 압도적입니다. 1950년대 사복부터 대관식 예복까지, 주연과 엑스트라를 가리지 않고 시대 고증이 철저하게 이뤄져 있습니다. 시즌 1의 제작비만 1억 파운드를 넘었다는 사실이 화면에서 그대로 보입니다. 전시용 드레스를 별도로 공수해 촬영에 사용했다는 제작 비하인드를 알고 다시 보면 의상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입니다.

 

피터 모건의 각본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 극적 허구(dramatic fiction)를 결합하는 방식을 씁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실제 기록으로 검증된 사건을 의미하고, 극적 허구란 그 사실의 공백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채운 부분입니다. 이 두 층위를 구분하지 않고 보면 마치 모든 장면이 실제 일처럼 느껴지는데, 그게 이 드라마의 흡입력입니다. 실제로 영국 문화부 장관과 배우 주디 덴치 같은 인물들이 허구임을 명확히 표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넷플릭스는 시즌 5 공개 시점에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허구적 각색'임을 명시하는 고지문을 추가했습니다.

 

이 드라마의 시각적 완성도가 어느 수준인지는 수상 이력이 말해줍니다.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BAFTA)에서도 더 크라운은 주요 부문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BAFTA란 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의 약자로, 영국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영화·방송 시상식입니다([출처: BAFTA](https://www.bafta.org)).

 

배우들의 연기는 이 모든 시각적 설계 위에서 작동합니다. 특히 클레어 포이가 보여준 초반부의 연기는, 젊은 여성이 갑자기 국가의 상징이 되어야 하는 공포를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전달합니다. 올리비아 콜먼의 중년 엘리자베스는 그 두려움이 완전히 굳어버린 얼굴을 보여줍니다. 제 경험상 같은 인물을 다른 배우가 이어받는 방식은 자칫 몰입을 깨기 쉬운데, 더 크라운은 오히려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게 만드는 장치가 됩니다. 더 크라운은 권력이 한 사람을 완성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서서히 가져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왕관은 반짝이지만, 그 무게는 결코 화면 위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 드라마를 좋아하든 아니든, 인간 관계와 감정의 결이 오래 남는 드라마를 찾는 분이라면 시즌 1부터 천천히 따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한 시즌을 다 보고 나면 다음 시즌이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는 구조라, 시리즈 순서대로 보는 것이 감정선을 제대로 따라가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