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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영화를 보고 나서 피곤함도 잊은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경험,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저도 주말에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인터스텔라를 보고 나오면서 딱 그 상태였습니다. 169분짜리 영화인데, 단 한 번도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를 두고 "어렵다"는 분들도 있고, "소름 돋는다"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두 말이 동시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황폐한 지구와 웜홀, 이 이야기의 출발점
영화의 배경은 2067년입니다. 지구 전체를 덮는 황사와 극심한 사막화로 인해 옥수수 외에는 재배 가능한 작물이 없는 세계입니다. 식량난이 심각해지자 사람들은 우주 탐사에 관심을 끊었고, 결국 NASA마저 해체 수순을 밟게 됩니다. 이 설정이 저는 꽤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기후변화와 토양 황폐화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농경지의 33% 이상이 이미 중등도 이상의 토양 열화 상태에 있습니다([출처: FAO](https://www.fao.org)). 영화가 만들어낸 세계관이 허무맹랑한 픽션이 아니라 현실의 연장선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인공 쿠퍼(매튜 맥커너히)는 전직 NASA 엔지니어 출신 농부입니다. 딸 머피의 방에서 반복되는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좌표를 발견하고, 비밀리에 운영되는 NASA 기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브랜드 교수(마이클 케인)로부터 라자로 프로젝트 설명을 듣습니다. 토성 근처에 출현한 웜홀(wormhole)을 활용해 거주 가능한 행성을 탐사하는 계획입니다. 여기서 웜홀이란, 시공간의 두 지점을 단축 연결하는 이론상의 통로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파생된 개념입니다. 영화는 이 웜홀의 형태를 구형(球形)으로 시각화했는데, 이는 실제 물리학 자문을 받아 구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저는 필름 영화로 관람하려 했다가 상영관 오류로 결국 디지털로 보게 됐는데, 그 부분에서 살짝 기분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직도 35mm 필름으로 촬영을 고수하는 감독으로 유명합니다. 디지털 대비 필름이 색 재현력과 명암비 측면에서 더 풍부한 톤을 구현한다는 게 그의 철학인데, 관객 동의 없이 디지털로 전환한 건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시간지연 효과와 만 박사의 배신, 과학과 감정 사이
탐사대가 처음 방문하는 밀러 행성에서 이 영화 최대의 충격이 하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대한 블랙홀 가르간튀아 근처에 위치한 이 행성에서는 극심한 시간 지연(Time Dilation) 현상이 발생합니다. 시간 지연이란, 강한 중력장 근처에서 시간이 외부보다 느리게 흐르는 현상으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예측한 실제 물리 현상입니다. 행성에서의 1시간이 지구 시간으로 7년에 해당합니다. 탐사대가 행성에 잠깐 내려갔다 돌아왔을 때, 우주선에서 혼자 기다린 로밀리는 이미 23년을 보낸 후였습니다. 이 장면이 저한테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크게 와닿은 순간이었습니다. 눈앞의 사람과 단 몇 시간을 함께했는데, 그 사이 상대방은 수십 년을 보낸다는 개념 자체가 너무 가슴 아프게 느껴졌거든요. 과학 개념이지만, 그 감정은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다음 목적지인 만 박사(맷 데이먼)의 행성에서는 더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납니다. 만 박사가 거짓 데이터를 전송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브랜드 교수의 플랜 A, 즉 현생 인류를 우주선으로 이주시키는 계획 자체가 처음부터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교수는 이미 중력 방정식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부분을 두고 "플랜 A는 처음부터 사기였다"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다른 시각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하다고 알면서도 사람들이 지구를 포기하지 않도록 희망을 심어준 것이니까요. 선의의 거짓말과 기만 사이 어딘가에 있는 윤리적 질문을 영화가 의도적으로 던지는 것 같았습니다.
인터스텔라가 다루는 핵심 과학 개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웜홀(Wormhole): 시공간의 두 점을 잇는 이론적 지름길
- 시간 지연(Time Dilation): 강한 중력장 또는 고속 운동 환경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현상
- 테서랙트(Tesseract): 3차원을 초월한 4차원 이상의 공간 구조물로, 영화 내에서 5차원 공간으로 시각화됨
- 특이점(Singularity): 블랙홀 중심의 밀도와 중력이 무한대로 수렴하는 지점
테서랙트와 결말, 사랑이 물리 법칙을 넘는다는 메시지
결말부에서 쿠퍼는 아멜리아(앤 해서웨이)를 에드먼즈 행성으로 보내기 위해 자신과 로봇 타스를 희생시키고 블랙홀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도달한 곳이 바로 테서랙트(Tesseract)입니다. 테서랙트란 영화에서 미래 인류가 5차원 공간에 구현한 일종의 구조물로, 3차원 존재인 쿠퍼가 과거의 시간축을 물리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영화에서는 이를 책장과 시계, 모래먼지로 이루어진 거대한 격자 구조물로 시각화했습니다.
여기서 쿠퍼는 깨닫습니다. 어린 머피의 방에서 책을 떨어뜨리고, 모래로 신호를 보냈던 '유령'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타스가 수집한 블랙홀 내부의 양자 데이터(quantum data)를 머피의 시계에 모스 부호로 전송합니다. 양자 데이터란, 양자역학 수준에서 관측된 입자의 상태 정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데이터를 통해서만 중력 방정식의 완성이 가능했다는 게 영화의 논리입니다.
성인이 된 머피(제시카 차스테인)는 이 신호를 해독해 중력 방정식을 완성하고, 인류는 우주 정거장 '쿠퍼 스테이션'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국내 관객들이 이 결말을 두고 "감동적이다"와 "억지스럽다"로 나뉘는데, 저는 전자 쪽에 더 가깝습니다. 과학 고증이 탄탄한 영화가 결국 '사랑'을 물리 법칙과 동등한 힘으로 놓는 방식이 억지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모순이 오히려 이 영화를 차갑지 않게 만드는 장치라고 느꼈습니다.
한스 짐머의 음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을 중심으로 구성된 OST는 우주의 광대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영화 음악 전문 매체 사운드트랙닷넷의 분석에 따르면, 짐머는 이 작품에서 기존의 오케스트라 편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오르간의 잔향 효과를 전면에 배치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음악적으로 구현했다고 합니다([출처: Soundtrack.Net](https://www.soundtrack.net)).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과 지식이 부족하면 이해하기 어렵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보고 나니 몰입하는 데 전공 지식이 필요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개념이 어렵더라도 감정의 흐름이 관객을 끌고 가는 힘이 충분히 강했습니다. 넷플릭스에서도 시청 가능하니, 아직 안 보신 분이라면 한 번쯤 시간을 내볼 만합니다. 저는 솔직히 혼자서 한 번 더 보러 가고 싶습니다.
